B는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난 지 시험해보았다. 그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햇무리 아래 얕게 일렁이는 물살을 떠올렸다. 해의 길을 따라 하얗게 부서지는 별들이 수놓인 군청색의 천이 B의 머릿속을 덮었다. B는 그 선에서 상상을 끝내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고즈넉한 밤하늘 아래 누워 의식을 아주 멀리 흘려보냈다.
시간이 마치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 중 하루에 일어난 일이었다. 청명하고 푸르른 하늘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이라 하면 어쩐지 그림 같은 장면이지 않나. 하고 B는 속으로 생각을 되뇌었다. 하늘에는 새파란 도화지에 수채화로 그려넣은듯한 구름이 몽실거리며 자리해있고 햇살은 따스하게 주변 풍경을 감싸안는 날이다. 그에 응한 초목들은 자신들의 색채를 뚜렷하게 발산하면서 풍경에 당당히 자리해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B는 지금 자신이 보내는 시간이 평화의 현신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을 지독하게도 몰아세우던 게임이 끝난 날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자유를 구현하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달리는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온 고난을 미화시키고 현실을 즐기기에 차고 넘치는 행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시간을 꾸려나갔으며 두 사람도 딱히 예외적이지는 않았다. 둘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누리는 식으로 시간을 꾸렸다. 이를테면 보기만 해도 달콤한 하이얀 케이크를 자신들의 탁상 위에 올려놓고선 하고싶었던 말들을 나누며 느릿하게 오후를 채워나가는 식으로.
B는 새로운 경험에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확히는 A가 B가 느끼는 즐거움을 숨기도록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하얀 크림으로 감싸진 케이크를 입 안에 넣자 만면에 희미하게 퍼진 미소를 바라보며 A는 본인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웃고있었다. A의 잔에는 아직 반이 넘게 홍차가 남아 있었지만 자신의 잔에 홍차를 조금 부으며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B의 잔에도 홍차를 채워주었다.
“케이크는 마음에 들어요?”
“네, 굉장히…맛있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맛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래도 제 노력이 헛되진 않았네요. B에게만 들릴 듯 작게 중얼거리며 A는 기존에 띄고있던 미소보다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B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입을 열기도 전에 A가 다시 자신이 사들고 온 것을 내미는 모습에 잠자코 간식거리들을 입에 넣었다. 가게에 간 김에 이것도 맛있어 보여서 사왔다며, 본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 것 같다며 간식을 함께 먹자 찜찜한 듯 보였던 B의 표정이 안심한 듯 맑아졌다. A는 케이크 류를 주로 사온 본인의 선택에 상당히 만족스러워 했다.
평화로운 하루였으며, 둘 중 누구도 이러한 분위기를 깨고자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얼마 뒤 이어진 A의 말에 B가 눈에 띄게 굳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뭘 해보고 싶어요?”
B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B가 지난 나흘 간 고군분투를 속행한 이유가 되겠다.
“요즘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당신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C의 반문에도 B는 묵묵히 자신의 마스크를 올려썼다. 뚫어져라 B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으나 B는 그저 고개를 돌리고 묵묵부답인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 C는 지지않고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빤히 응시했지만, C의 기준으로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결국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C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리를 뜨려던 차에 당장 죽을 상을 하고서도 아무 말도 않는 B에게 괘씸함이 몰려와서, 울컥한 마음에 C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혼자서만 앓다가 주변 사람들이 복창 터져도 난 모른다~”
그렇게 말하곤 발을 돌려 걸어가던 중에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뭇거리는 말을 분명히 들었으나 C는 발걸음을 제촉했고, 이내 B가 전보다 더 큰 소리로 C의 이름을 부른 후에야 그가 뒤를 돌았다. 왜~? 뭐 할 말 있어? 능청스럽게 웃으며 제자리에 가만히 선 C는 아까 전처럼 B를 뚫어질 듯이 바라봤고, 스스로 불러세운 만큼 B는 시선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많이, 답답하십니까.”
예상치 못한 답에 C가 짐짓 눈을 크게 뜨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다시 B에게로 걸어갔다.
“이제 문제를 말해주면 답답하지 않을 거 같은데?”
결국엔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에 B는 한숨을 얕게 내쉬곤 사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입니다. 응응. …A씨께서 제게 질문을 하나 하셨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무얼 하고 싶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랬구나~그런데 그게 왜? …무얼 얘기해야할지 감이 오질 않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걸 말하면 되잖아? …잘, 떠오르질 않아서.
“…이런 불안정함은 아직도…어렵습니다.”
죽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때엔 늘 정해진 절차가 있다. 어떠한 불안도, 고난도 없이 오로지 그 순간에 떠나는 것에만 집중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안식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남겨진 자들의 소망을 위해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걸 체감할 수 있다. 정결하고 경건한 시간 속에선 반드시 그들의 안식에 스며들게 되어있으며, 그러다보면 도리어 코앞의 안식이 아닌 혼잡한 세상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질 때가 온다. 누구보다 죽음의 평안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살아남았다. B는 이전과 달라진 스스로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무엇이 어떠한 경위로 인해 달라졌는 지를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명확한 건 더 이상 이전만큼 죽음이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어지러운 현실에 죽음의 평안함을 떠올릴 순 있어도, 그 방식을 채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때 안식에 누구보다 가까운 삶을 살았던 걸 감안하면 개연성이 부족할 정도의 변화였다.
“그…계획이, 뭐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되거든? 난 그냥 게임 끝나면 돈들고 방탕한 여행이나 즐기려고 했단 말이지. 아, 그래! 가고 싶은 곳은 없었어? 산이나 바다나, 아니면 어디 유명한 명소나…뭐, 그런 것들. 때론 뻔한 게 즐거울 때도 있는 법이지!”
“…여행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제 좀 얼굴이 살아났네. 얼마 전까진 좋아보이더니, 며칠 사이에 팍 죽을 상을 하고 말이야. 겨우 좋아졌나 싶었는데.”
“…좋아보였다는 건 무슨 뜻이십니까?”
응? 그냥 표정이 전보다 밝아졌다고. 당사자는 몰라도, 보는 사람 입장에선 티가 잘 나거든.
멍하게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B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C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부담갖지 마, A는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좋아할 걸~.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엔 C는 이미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B는 결국 찾아가길 포기한 듯 벤치에 등을 기댔다. 해가 한층 약해질 즈음 바깥에 나왔으나, 낮이 지고 노을이 필 때까지 B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B는 방의 불을 끄고 이불 아래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정신을 침잠시키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잔뜩 뒤엉킨 실타래를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실마리 하나 찾아내지 못했는데 잠자리에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벤치에서 가만히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무렵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A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부담 느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B는 그의 앞에서 사과하지 말아 달라며 쩔쩔맸다. A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보고 나서야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느꼈던 답답한 감정은 여태 사라지지 않고 B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B의 인생은 경험이 한정적이고 죽음으로 들어차 있었다. 사람은 경험을 토대로 타의 것을 보니, B의 세상 또한 그의 눈대로 흘러갔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에 B는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조차 이방인에 속했다. 그는 침묵으로 간극을 채웠다. B가 마지막으로 택한 처절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런고로 A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이끌리면서 B가 든 생각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구나 와 같은 부류의 감상이어야만 했다. A는 본인과 닮았다는 말을 전하기에도 실례가 될 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B는 그 기이한 감상을 결국 부정하지 못했다. 이 척박한 사단에서도 다정을 놓지 않을 만큼 강인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는 B와 닮은 구석이 있었고, 동시에 아주 많이 달랐기에 B는 A를 쫓았다. B는 A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으며, A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겠으나 단 한 번도 이를 이용해본 적은 없다. B가 애정을 가지기에 부족한 요소가 없는 사람이다.
B가 불안함을 가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그의 눈에 늘 덮여있던 천이 없어진 날부터 계속 체감해왔다. B를 보는 눈빛과 표정.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가감 없는 애정. A에겐 경험이 있었고 B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런 확신도 자신도 없으니, 물살이라도 갈라버릴 듯한 바다색의 눈을 보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디를 가고 싶냐니, 모르겠습니다. 미래를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는걸요. 주어진 일을 하면서 끝을 바라보고. 이따금 자신의 끝의 가능성을 가늠해본 것이 전부였는데.
무얼 하면 A같은 눈을 할 수 있을까.
B는 이제는 꽤 분명하게 자신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걸 자각했다. 이전보다 훨씬 즐거워 보인다는 C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이전의 일보다 더욱 즐거운 게 생겼고, 심지어는 그와 관련된 일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도 마지막이 기껍지 않았다. B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이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이후로도 한참을 고민했다.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를 성급히 재단하기보단 방법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는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고요의 바다 속에서 차분하게 유영했다.
B는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시험해보았다. 그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햇무리 아래 얕게 일렁이는 물살을 떠올렸다. 해의 길을 따라 하얗게 부서지는 별들이 수 놓인 군청색의 천이 B의 머릿속을 덮었다. B는 그 선에서 상상을 끝내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고즈넉한 밤하늘 아래 누워 의식을 아주 멀리 흘려보냈다.
B는 가방의 손잡이를 쥔 채 역사의 시간표를 바라봤다. 이내 내려다본 기차표에는 11:00 라 적혀있었다. 두 사람이 탈 열차가 출발하기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저 멀리부터 B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일을 마친 A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안 늦었죠?”
“네, 이제 탑승하면 됩니다.”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기대되네요.”
칠흑 같은 바다에서 유영하던 그 시간 동안 B가 내린 결론은 바로 바다에 가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A를 찾아가 이 말을 꺼냈더니,
“그 말 하려고 아침부터 이렇게 뛰어왔어요?”
라고 하며 오히려 급하게 뛰어오느라 숨을 고르고 있는 B를 걱정하기 바빴다. 그 다정한 성정이 무척이나 익숙하고 A답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을 A를 신경 써 빠르게 답을 전달하고자 했던 B의 입장에선 무척 속 편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가실 겁니까?”
B는 정돈되지 않은 숨을 내쉬면서도 A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A는 당연히 무슨 말이 나오든 간에 받아들일 생각이었기에 딱히 급박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그 결과로 이토록 선명한 눈빛을 받을 줄은 몰랐던 탓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는 이내 B의 등을 차분히 두드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럼요 B. 가요, 바다여행.”
그렇게 시작된 첫 여행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가격 대비 괜찮은 좌석을 나란히 예매해 둘이 붙어서 가게 되었고 오늘은 바다 날씨도 흐리지 않고 화창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들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여정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서로의 시간 속에 서로를 채워나가며 순탄한 여정을 탈바꿈시켰다.
생각보다 긴 이동시간에 A가 간간이 꾸벅거릴 때도, B는 그저 A에게 베개를 안겨줄 뿐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 창문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색적인 풍경들을 B는 빠짐없이 그의 눈에 담았다. 잿빛 바탕에 색색의 건물들이 빠르게 드리워졌다.
이번 역에서 하차하면 된다는 안내원의 말에 A를 얕게 흔들어 깨웠다.
“A. 일어나요. 도착했습니다.”
“으음…도착이에요? 너무 오래 자버렸네. 미안해요.”
“아닙니다. 바깥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어요.”
그랬다면 다행이고요. A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기지개를 피고 짐을 챙겼다. 나도 내 몫의 짐을 빠짐없이 챙기고선 좌석에서 빠져나왔다. 두고 간 게 없는지 자리를 둘러보고 나오니 기차 문 바로 앞에서 A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달라는 듯 손을 뻗는 제스쳐에 어쩔 수 없이 짐을 맡기고 걸어 내려왔다. 양손 가득 들린 짐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그의 호의라 할지도 마냥 들고 있게 할 순 없었다. 제 짐은 돌려달라고 말하려던 때에, A가 문득 그의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B, 저기 좀 봐요.”
바다가 바로 앞에 있어요.
A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 앞에는 말 그대로…쾌청한 하늘 아래에 수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푸른 바다가 넓게 깔려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바다였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저,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히 채웠다. 걸음을 한 발짝씩 내딛을수록 가까워지는 바닷냄새에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또 한 발짝 내디뎠을 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맞부딪혔다. 걸음에 더 박차를 가했다. 이걸 보기 위해서 먼 거리를 강행했던 거다. 나의 선택이. 고민이. 변화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줄 바다가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마음에 드나보네요, B.”
실제로 본 바다는 사진으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시야 전체가 청명한 바다로 가득 채워지는 감각.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선명하게 느껴지는 소금 내가 바다의 기억에 자리 잡았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이 뒤로도 한참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정하게 철썩이는 파도에 부서지는 포말을 하염없이 봤다. 햇무리 아래 얕게 일렁이는 물살도, 해의 길을 따라 하얗게 부서지는 별들도. 그들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인상적이어서, 별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 오른쪽에 서있는 A를 쳐다보았다.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바다로 뛰어왔던 게 떠오르면서 사과라도 할 작정이었는데…
A 또한 내가 보던 풍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그 A의 시선은 내가 바다를 보던 시선과 굉장히 닮아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확신이 생겼다. 경험의 부재, 자신을 지독한 불안에 떨게 했던 텅 빈 공간이 우리의 경험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A.”
“네?”
바닷바람을 타고 그의 머리카락이 뒤쪽으로 나부꼈다. 할 수 있겠구나.
“저희 앞으로 같이 살까요?”
덤덤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듣기에도 분명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A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껏 봤던 모습 중에 가장…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입을 달싹였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또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으나 확실한 어떤 행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버벅대던 A는 결국 눈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숨김없이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 말 하려던 거.”
“모를 수가 없었죠.”
“B는 지금 내가 그 말을 얼마나 오래 머금고 있었는지 알아요? 정말…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네요.”
A는 나를 바라보며 세상 둘도 없이 밝은 얼굴을 하고선,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곧장 나를 끌어안았다. 크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가 둘 중 누구의 것인지 논하는 게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내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하기보다는 갑작스레 끌어안아 버린 것에 잠시 주춤하고 있는 A에 등 쪽으로 손을 뻗어 그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키 때문인지 도리어 안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A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A는 벅차오르거나 아니면 기뻐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요. 아니…이것보다는, 먼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사람은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보고, 나의 세상은 언제나 나의 눈을 따라 흘러간다. 흐리고 척박한 잿빛의 삶에 바다를 덮어씌우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내 회색빛으로 이토록 생생한 감각들을 비출 날을 스스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 아래의 세상을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의 아득함이 무색해질 때까지, 그의 세상을 수식할 수 있는 날까지 A가 곁에 있어 줄 것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평화의 현신이겠구나.
B는 A의 품에서 잠시 빠져나와 환히 웃어 보였다. 그의 눈에 푸른 미래를 담아, 아주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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